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보당의 난 (문단 편집) == 평가 == 김보당은 [[문벌귀족]]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처음에는 무신 정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반무신의 입장으로 돌아섰으며, 동북면 병마사의 직에 오른 것을 기회로 의종을 옹립하면서 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보당이 죽으면서 이 일에 문신이 모두 가담했다고 고변하여 많은 문신이 살해당했다. [[무신정변]]으로 인해 많은 문신이 살해되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문신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그 살아남은 문신들 역시 김보당의 난의 계기로 살해된 것이다. 김보당의 난은 무신정권에도 영향을 줬다. 김보당의 난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의종을 시해한 결과 집권자 [[이의방]]은 큰 반발에 직면했다. 그리고 1년 후 이의방은 [[조위총의 난]]이 일어난 어수선한 상황에서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해 암살당한다. 또한 [[경대승]]은 김보당의 난 당시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집권하였고, 그 이후 집권한 이의민 역시 의종을 시해한 사건으로 인해 정치권력을 크게 제약받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최충헌]]이 보다 쉽게 정변을 단행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보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김보당의 난이 일어난 결과 [[무신정변]]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무신정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의종(고려)|의종]]이 살해되고 그나마 남은 문신들도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의종이 1년만 더 살았으면 조위총의 난이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결국 김보당의 난의 결과 향후 100년간 [[무신정권]]이 지속되는 고착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김보당을 고려사에선 열전으로 올리지 않은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암군의 모습을 보인 의종을 복위시키려했다는 점에서 김보당도 처음에 무신정변을 지지했고, 하필 김보당이 입이 가벼워 문신들이 이 반란에 가담했다고 불어버린 통에 조선왕조에서 그를 열전에 올리지 않았으나 동국통감에선 오히려 이의방 정중부의 난 이후 무정부상태에 빠지며 나라가 더 추락할 기미가 생기고 의종도 정신을 차렸다는 점에서 재평가를 하고 김보당의 난이 아닌 의종복위사건 혹은 의종복위운동으로 재평가가 되고 있다. 종합해보자면 김보당 본인은 의종과 무인권력자들 모두 비판하고 생각의 취지는 좋았으나 명분만 좋았을뿐 실리를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 점에서 보면 김보당 개인은 매우 우유부단한 인물이었고 반란 역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다. 여러모로 김보당은 고려 문관들의 장점과 단점을 여실히 보여준 인물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